강한자 칼럼 –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강한자 칼럼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조지 버나드 쇼는 ‘부모란 하나의 중요한 직업이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자식을 위해 이 직업의 적성검사가 행하여진 적은 없다.’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사실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으면서 자동적으로 부모의 대열에 오르게 된다.    마음 속의 사념을 물리치고 선(善)한 마음으로 가득차게 만들던 아이들의 초롱초롱 빛나는 맑은 눈망울을 통해 세상의  행복을 만끽할 수 있었던 시간들은 어느 부모에게든 소중한 기억이 된다.   하지만 이런 맑은 눈동자가 탁함으로 변해가면서 우리의 가정과 사회는 소용돌이에 휘몰리고 있다.

아주 오래 전에 이민온 지 얼마 안되었을 때 맥도널드에서의 일이었다.   내 앞에 어린 자녀들과 함께 온 부모가  서있었는데, 아이 것을 주문하기 위하여 그 어린 꼬마에게 일일히 뭘 먹겠냐?  치즈를 넣느냐?  야채는?  케챂은? 등과 같이 사소한 것 까지 아이의 취향을 물어서 챙기며 그 아이가 원하는 것으로 주문하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모습이 기억난다.   또, 다른  모습은, 한 엄마와 한 어린아이가 앉아있었는데 아이가 무엇 때문인지 계속 보채고 있었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작은 목소리로 “No!”라고 답하였다.  그래도 아이는 아랑곳 없었다.  어머니는 다시 한번 “No!”라고 말을 하였다.  그래도 아이가 계속 보채자 더욱 단호하고 좀 더 큰 목소리로 “I said, No!”라고 말을 하자 아이가 멈추었다.

그런 두 모습들이 한국의 일반적인 일방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부모들의 태도와 사뭇 달라서 교육자로서의 호기심에 이후 많은 부모들을 지켜보았었는데 그러한 일면은 그 특정한 부모 에게서만이 아닌 많은 서양 부모들의 모습들에도 비슷하게 발견되는 것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서양인들이 그런 어린 시절부터의 자연스런 교육 배경에 이후 학교에서의 토론 및 프리젠테이션등 사고력과 발표력 중심의 교육이 더하여짐으로써, 대화와 토론을 즐길 줄 알고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힐 줄 아는 것 같다고 나름대로 그 이유를 유추하여 보았다.

어릴 때 부터 자녀나 아이들을 한 인격체로서 성인 같이 대하며 질문하고 받아주는 부모들 및 어른들의 자세, 특히 어머니의 상냥한 태도 및 그릇된 것이 있으면 단호하게 안된다고 가르쳐줄 수 있는 훈육 자세등이 있다면 오늘 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심각해져가는 청소년의 문제나 사회 문제들을 나름대로 감소 내지는 해소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한국의 한 식당 에서 아이가 마구 뛰어다니며 소란을 피우는데도 부모가 전혀 신경도 쓰지않자, 주변에 앉아 있었던 손님들이 보다못해 그 아이에게 주의를 주었더니 그 부모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에 오히려 자기 아이의 기를 왜 죽이냐며 대드는 모습에 그 장면을 본 목격자도 어이가 없었다고 말하는 웃지 못할 이야기는 분명 현시대의 우리의 일그러진 자화상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 국가의 운명은 청년의 교육에 달려 있다’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현시대를 보면 무엇이라고 말할 지 궁금하다.   청소년에서 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각종 범죄들의 동기들은 심리적 정서의 부조화 및 이성이라는 힘의 견제력의 약화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기에 때로는 폭발하는 감정들을 상황에 따라 억제하기가 힘들 때가 많다.  하지만 난폭한 부모의 감정들을 어린시절 부터 직접 감수해온 아이들이 추후에 방황하는 실례가  더 많다는 것은 부모의 언행이 자녀의 미래의 행동 및 성향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말한다.

흔히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에 대한 과학적인 근거들로,  인간의 두뇌의 80%는 유아기에 완성이 되며 이 뇌세포 연결망인 시냅스는 3세 – 6세 사이에 왕성 하게 발달되고, 부모와의 스킨십은 아이들의 정서적인 안정과 신뢰감을 주면서 유아기의 뇌의 정서와 도덕성을 담당하는 전두엽의 발달을 가져온다고 한다.  문제가 되고 있는 흉악범과 성범죄자들의 경우는 이 시기에 부모와의 안정적인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한 명의 현모는 백 명의 교사에 필적한다.’  ‘교육은 어머니의 무릎에서 시작되고 유년  시절에 전해들은 모든 말이 성격을 형성한다.’  ‘어떤 사람은 흔히 자녀들의 몸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정신에 대해서는 소홀히 대한다.  이런 사람은 아이들을 돌본다고 할 수 없다.’등의 명언에서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청소년의 문제는 단순히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 부모들의 잘못된 언행과 자세등의 문제에서 야기되고 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태교부터  중요시하던 옛날 양반가의 자녀에 대한 훈육방법은 교육의 중요성의 시기를 태어나기 이전 부터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면 선조들의 지혜 및 예지가 더욱 존경스럽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