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한자 칼럼>
따뜻한 자본주의 4.0 시대를 위하여
2012.02.21
자본주의도 생명체처럼 진화한다고 주장하는 아나톨 칼레츠키(Anatole Kaletsky)는 저서 ‘자본주의 4.0’을 통해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제시한 저널리스트로서 “자본주의 2.0 시대에는 언제나 정부가 옳고 시장이 잘못됐다는 식이었고, 자본주의 3.0 시대에는 언제나 시장이 옳고 정부가 잘못됐다고 여겨졌다. 이제 “자본주의 4.0 시대에는 정부와 시장 모두 잘못될 수 있고, 때로는 이런 오류가 거의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말하길 따뜻한 자본주의를 표방하는 4.0 시대에서는 기업인들은 기업을 키우면서 수익창출을 내는 가운데 ‘+α’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나눔과 배려,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사회구성원들을 감동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최근에 한국의 경우에도 자본주의 4.0시대에 편승하여 나눔을 중시하면서 나누기 운동이 보다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풍토는 바람직한 일이다.
유명한 명구인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와 같이 이젠 인류는 ‘소유냐 존재냐’ 의 문제에서 한 단계 발전해 가는 것 같이 보인다. 에리히 프롬의 저서’소유냐 존재냐’에서는 인간 생존의 두 가지 양식, 즉 재산.지식.사회적 지위.권력등의 ‘소유’에 전념하는 ‘소유양식’과 자기 능력을 능동적으로 발휘하며 삶의 희열을 확신할 수 있는 ‘존재양식’을 구별하고 있다. 고도로 산업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소유양식’이 자명한 전제가 되고 ‘존재양식’을 능가하는 점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의 실현은 ‘이익,권력, 지성과 같은 낡은 동기’가 ‘존재, 나누어 갖는 것, 이해와 같은 새로운 동기’로 대치되었을 때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인간에게는 ‘갖는’ 즉 소유하는 경향과 ‘존재’ 즉 나누어 갖고, 주고, 희생을 치르는 두 가지 경향이 있다고 한다. 모든 인간 속에는 이 두 가지 모순된 노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회의 가치와 규범이 이 두 가지 중 어느 쪽이 우위에 서는가에 따라 사회구조가 결정된다고 하니 간과할 수 없는 문제로 보인다. 소유양식은 타인을 배제하는 것으로, 불타는 이런 행동양식을 갈망이라 묘사했고, 유태교와 기독교에서는 탐욕이라고 묘사하였으며, 그것은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어떤 죽은 것으로 변모시키고 타인의 힘에 종속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소위 5욕이라고 해서 인간의 신체 일부인 눈, 귀, 코, 혀와 몸의 감각기관과 연결되어 일어 나는 욕망들인 – 물질욕, 명예욕, 수면욕, 성욕, 식욕등의 인간이 자제하기 어려운 5가지의 욕망이 있는데, 사실 이런 욕망을 좋은 방향으로 잘 활용한다면 자신의 발전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반대의 방향으로 사용할 때는 사회의 문제들을 야기시킬 수 있다. 이중 몇 가지를 예로 들면, 물질욕에 대한 강한 소유는 탐욕으로 나타나 급기야 타인의 것을 빼앗게 되고, 명예욕에 대한 강한 소유는 타인을 희생시키며 권력을 향해 치닫거나 또는 권력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을 불행케 만들고, 성욕에 대한 강한 소유는 사회속에 물의를 만들며 자신 또한 추락해 가면서 각종 범죄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그리스의 고대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일컫는데서 심리학자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에 의해 만들어진 이론인 페르소나(persona)는 타인에게 비치는 외적 성격을 나타내는 용어로 인간은 천 개의 페르소나(가면)를 지니고 있어서 상황에 따라 적절한 페르소나를 쓰고 관계를 이루어 간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내가 친절한 것처럼 보이지만 나의 친절이 착취성을 감추는 가면에 불과하다면, 외관, 즉 나의 겉으로 드러난 행동은 나를 움직이는 진정한 힘과는 심한 모순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국가끼리나 개인 및 그룹들 사이에서 또는 정당,종교,각 단체등의 여러 조직들 사이에서 자신들 만의 이익과 권력과 지성을 위해 활동하기 보다는 존재하고 나누어 가지며 이해하도록 노력하는 사회가 되는 것이 보다 중요해지는 것 같다. 캐나다의 한인 동포사회에서도 이런 존재를 위한 행동들에 기반한다면 서로 발전하지 않을까 생각한다.